삼성전자, CES 2026에서 ‘8억 기기 AI 대중화’ 선언: 한국 테크 자이언트의 야심과 현실
라스베이거스 윈 호텔의 단독 전시장. 올해 삼성전자는 수백 개 기업이 부스를 경쟁적으로 꾸리는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를 떠나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했다. 노태문 DX부문장(사장)은 기자들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총 8억대 기기에 AI를 탑재해 대중화하겠다.” 올해 신제품 4억대, 기존 제품 4억대. 숫자는 야심차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중국 업체들의 추격, 메모리 부품 가격 인상, 환율 변동, 그리고 조용히 후퇴한 가정용 로봇 ‘볼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삼성전자의 CES 2026 전략은 명확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노 사장은 공조, 전장, 의료 테크, 로봇 네 분야를 신성장 동력으로 지목하며 관련 인수·합병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주목할 점은 로봇 전략의 변화다. 테슬라, 현대차 등이 휴머노이드 로봇을 전면에 내세우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이번 CES에서 별다른 로봇 제품을 선보이지 않았다. 노 사장의 설명은 실용적이었다. “먼저 삼성전자의 생산 거점에서 로봇을 우선 추진하고, 여기서 쌓은 기술과 역량으로 B2B나 B2C 사업에 진출할 것이다.” 2020년 CES에서 화제를 모았던 가정용 로봇 볼리는 현재 상용화 계획이 없다. 소비자 시장을 향한 장밋빛 미래보다 제조 현장에서의 데이터 축적을 택한 것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도 이 발표에 녹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026년 70조원 규모의 투자 전쟁을 예고하고 있으며, HBM4를 비롯한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같은 CES에서 차세대 HBM4 16단 48GB 제품을 공개했다.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 57%를 차지한 SK하이닉스와 추격하는 삼성전자의 경쟁은 한국이 AI 시대 반도체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시험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노 사장은 중국 업체들의 추격, 관세 리스크, 환율 변동, 메모리 공급 부족을 대외 환경의 도전 요소로 언급했다. “제품 가격 인상 부분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는 그의 발언에는 압박감이 묻어났다.
하우스 오브 세븐의 핵심 가치인 투명성과 공정성의 렌즈로 이 발표를 들여다보면,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8억 기기 AI 탑재라는 비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삼성전자의 AI가 진정으로 사용자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아니면 기기 교체 사이클을 촉진하는 마케팅 전략인지는 지켜봐야 한다. 로봇 전략의 전환 또한 재고해볼 만하다. 소비자 제품 상용화를 미루고 공장 자동화에 집중하는 선택은 기업 입장에서 합리적이지만, 이것이 한국 제조업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울산, 화성, 평택 등 삼성전자 생산 거점에서 로봇과 함께 일하게 될 노동자들의 미래, 재교육 기회, 일자리 전환 지원에 대한 논의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기술 발전의 과실이 공정하게 분배되려면 이러한 질문들이 기업 전략 발표와 함께 다뤄져야 한다.
삼성전자의 CES 2026 발표는 한국 테크 산업의 현주소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AI 시대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야심, 글로벌 경쟁의 압박, 그리고 화려한 비전 뒤에 숨은 현실적 과제들. 8억 기기에 탑재될 AI가 과연 한국인의 일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그리고 그 변화의 혜택과 비용은 누가 나눠 갖게 될 것인가?
Leave a Reply